Why did King Jeongjo implement the "Munchebanjeong" policy?

Why did King Jeongjo implement the “Munchebanjeong” policy?

 

Why did King Jeongjo implement the “Munchebanjeong”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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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776, King Jeongjo relocated the main palace from Gyeonghuigung to Changdeokgung.

He devised the “Asian True Leader” project at Gyujanggak.

He officially implemented the “Munchebanjeong” policy to revive the authentic literary style.

His objective was to revert to the pure classical style of literature, including the Book of Songs, Book of Documents, and Book of Rites.

The Three Classics represents the wise politics of the kings during the ancient golden age.

 

The Great Learning, Analects, Mencius, and Doctrine of the Mean, which are central to Neo-Confucianism, emphasize the universal order of propriety and rituals.

They do not recognize a distinction between the king and the aristocracy based on the origin of the universe and human nature.

The emphasis on these new classics led to the confrontation between King Jeongjo and the Noron faction.

 

While maintaining a policy of equalizing factions, King Jeongjo sought to strengthen royal authority.

He diluted the factional issue by transforming it into a cultural-political matter.

He converted young scholars from the Noron faction to a moderate faction, forming a more balanced political party.

The literary style whitewashes the political color by dressing it in the garment of literature.

The “Munchebanjeong” policy is a highly sophisticated political tac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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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왜 문체반정을 했을까?

 

1776년, 정조는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다.

규장각에서 아시아 맹주를 기획한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본격화한다.

시경, 서경, 주역 등 순수한 고문의 문체로 돌아가려 한다.

삼경三經은 고대 황금시대 성왕聖王들의 어진 정치이다.

성리학의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은 예禮라는 보편적 질서를 중시한다.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심성에 근거해 왕과 사대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권 중심은 정조와 노론의 대립을 낳는다.

정조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 왕권강화를 시도한다.

당파黨派 문제를 문화정치로 희석시킨다.

노론계의 젊은 문신들을 전향시켜 온건한 시파를 형성한다.

문풍이란 당의를 입혀 정치색을 표백시킨다.

문체반정은 고도의 정치전술이다.

 

정조正祖, 초인이 되다 🍂

1776(25세). 이산, 비상하는 운명의 하지夏至에 22대 조선의 왕(1776-1800)에 즉위한다. 노론벽파와 시파, 소론, 남인(청남.탁남), 탕평파, 신서파, 공서파간의 갈등 등 정적에 둘러 쌓인 운명에 대한 분노를 학문에 대한 초인적 열정으로 극복하며 조선의 문화황금기를 이끈 제왕이다.

1776.4.27. 정조 즉위. 규장각 준공.

홍국영, 승정원 도승지. 효장 세자, 진종眞宗 추존.

1778(정조 2년). 외가 홍봉한(노론 벽파) 치죄. 홍국영, 누이동생 후궁(원빈 홍씨) 입궁.

1777(정조 1년). 정조암살 미수사건(노론 벽파 홍상범). 은전군(사도세자·후궁 박씨), 사사.

1779(정조 3년). 홍국영, 실각. 원빈 홍씨(홍국영 동생) 사망.

1781(정조5년). 홍국영, 사망.

1782년(정조 6년). 외규장각.

1784(정조 8년). 김홍도, 경상도 안동 안기찰방(종6품).​

김홍도 스승, 강세황(1713-1791:남인) 북경 사행(청 건륭제 천수연).​​

옹주(의빈 성씨 소생:1784-1784) 사망.

1786(정조10년). 문효세자(의빈 성씨 소생:1782-1786) 사망. 의빈 성씨(1753-1786) 사망.

1788(정조 12년). 채제공(남인 영수), 등용. 장용영 설치.

1790(정조 14년). <무예도보통지>.

1791(정조 15년). 신해통공. 금란전권 폐지. 진경시대.

1789년(정조 13년). 김홍도, 일본 쓰시마 섬 정탐.

1791년(정조 15년).

정조는 자신이 머문 서향각(규장각 부속 서고)에서 윤동섬에게 어진御眞을 그리게 한다. 정조는 윤동섬의 필력을 칭송한다. 규장각 1층은 각신들이 공부를 하고 2층에 어진을 모신다. 윤동섬(尹東暹:1710-1795)은 소론 영수 윤증(尹拯:1629-1714)의 6촌 동생으로 서예와 금석문에 조예가 깊다. 윤동섬은 대사헌,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한다.

1792년(정조 16년). 문체반정. 서학금단.

1794(정조 18년).

일본 에도시대, 목판화 유카요에 화가 ‘토슈사이 샤라쿠’는 왕성한 활동(10개월)후 잠적한다. 김홍도라는 설이 있으나 도화서 출신 조선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다.

1795(정조 19년). 혜경궁 홍씨, ‘한중록’ 집필.

1796년(정조 20년), ‘화성(수원성)’ 완성.

1799년(정조 24년). <홍재전서>.

1800(정조 24년). 6. 28.

정조는 부스럼 치료를 위해 탕약을 먹는다. 탕약의 미량 독극물은 면역력을 급속히 떨어뜨린다. 창경궁 영춘궁에서 정조의 붕어를 지켜본 사람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이다. 청 황실嘉慶帝 또한 독살에 개입한다. 정조의 실학자(유학파)와 도화서 화원을 통한 청·일 첩보활동을 위협으로 판단한다. 정조의 꿈, 영원한 제국은 무산된다

노론(율곡학파). 시파, 벽파, 탕평파.

남인(퇴계학파). 서학파信西派, 탕평파, 반서학 탕평파攻西派.

벽파. 김상로, 김한구, 홍계희, 심환지, 김종수, 김귀주, 김한록, 홍상범, 홍계능, 김관주.

시파. 홍국영, 홍봉한, 윤행임, 유언호, 정민시.

남인. 채제공, 김치인,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서학파(신서파). 이승훈, 정약종, 윤지충, 권철신, 정약용, 윤행임, 황사영.

반서학 탕평파(공서파). 홍의호, 이기경, 목만중, 홍낙안.

탕평파. 채제공, 김종수, 이기량, 정약용, 이익운.

“<시경>,<서경>,<주역> 같은 삼경의 특징은 성왕聖王이라는 존재로 수렴된다. 그 경전의 내용은 모두 요임금, 순임금, 우옹, 탕왕, 주 문왕, 주 무왕 등 옛 성왕이 실현시킨 어진 정치를 찬양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주자가 체계화한 사서의 특징은 왕권에 집중되어 있는 초월성을 보다 일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델 속으로 확산시킨다.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심성을 설명하는 이理와 기氣의 철학적 이념이 도입된다. 이러한 차이점은 현실 정치에서 왕의 권위를 적극 옹호하는 왕권 중심주의와 예라는 보편적인 질서 아래서 왕과 사대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신권 중심주의의 대립을 낳는다.”

<영원한 제국>, 이인화.

“글씨를 볼 때는 마땅히 그 획과 점을 보아야 하며, 그림을 볼 때는 마땅히 준법皴法과 세를 보아야 하고, 역사를 볼 때는 다스려짐과 소홀함을 보아야 하며, 사람을 볼 때는 선함과 악함을 보아야 한다. 의리義理란 막중하고 막대한 것이어서 차마 하지 못하고, 감히 하지 못하며, 말하지 않는 것이 의리지만, 때가 되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의리이다. 의리란 천하의 공公으로서 치우쳐서는 안 되는데, 세상에는 혹시 기회를 타고 중히 여김을 빙자하여 자신의 사私를 끼고 남을 빼앗는 데까지 이르는 자가 있으니 그 역시 불인不仁이 심한 것이다.”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 정옥자.

1801(순조 1년). 심환지(노론 벽파), 남인 숙청과 신유박해. 은언군(사도세자·숙빈 임씨) 사사.

1802(순조 2년). 노론벽파·정순왕후(경주 김씨).

1805(순조 5년). 정순 왕후 사망. 노론시파·안동김씨(김조순) 세도정치.

1815(순조 15년). 헤경궁 홍씨 사망.

1820(순조 20년). 흥선대원군 출생(-1898).

1821(순조 21년). 콜레라. 효의 왕후(1754-1821) 사망.

1822(순조 22년).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1770-1822) 사망.

1827(순조 27년). 헌종 출생.

“무릇 천하의 일에는 모두 때가 있어서, 때가 오면 저절로 이루어지니, 인력으로 재촉할 필요가 없다. 재촉하면 도리어 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쉽게 발동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 성냄이 가장 심하다. 나는 매번 일에 임하여 몹시 성날 때마다, 잠시 그 일을 젖혀 두고 성냄을 가라앉혀 밤을 지낸 뒤에야 비로서 그 일을 처리한다. 이리하여 다행히 큰 잘못은 면했다.”

<일득록日得錄> 정조.

관용寬容은 스스로 완벽하지 않아, 자신의 잘못을 고치며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이고 아량雅量은 상대의 잘못을 예쁘게 보아줄 수 있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이다.

 

 

 

Written by : nomadsirius

‘Sirius’ is the brightest star in the night sky. Its name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Seirios, meaning ‘glowing’ or ‘scorching’. Imagining Sirius rising just before sunrise, I begin the classic ‘Nomad’ journey. To let the West know the essence of Oriental culture, I am planning to publish 333 e-books and a Fantasy in English.

On Making  All Things Equal

All  things are essentially one. East and West can no longer be kept apart

A discerning mind is a fixed mind. It divides and confronts the world. The heart given by Heaven is an open mind. Embracing the world, there is no co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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