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1987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_황제에서 시민으로 돌아오다.

 

‘마지막 황제’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삶을 다룬 서사 전기 드라마 영화이다.

이탈리아의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부의溥儀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1964)’를 각색하여 봉건제에서 혁명을 거친 중국의 모습을 화면에 담는다.

개인의 자유와 억압, 권력의 문제와 정치적 부조리와 같은 주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낸 베르톨루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탐색한다.

정치적 격류에 휩쓸린 개인의 비극과 권력의 허무함을 강렬한 내러티브의 상징적 언어로 표출시킨다.

장엄한 촬영 기법으로 예술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인물의 심리적 깊이와 내적 갈등에 투영한다.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한 ‘마지막 황제’는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에서 촬영된 최초의 서양 영화이다.

 

서기 1368년 요충지 남경南京을 근거지로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화북의 원나라를 내몽고와 연해주, 알타이, 시베리아로 몰아낸다.

명明 태조 홍무제洪武帝(1368-1398) 주원장은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해 견제세력을 없앤 후 육부六部를 황제에 직속시켜 강력한 군주독재제를 마련한다.

주원장은 황제 직속의 비밀경찰 금의위錦衣衛와 감찰기관 도찰원都察院을 설치해 개국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후 왕자들 또한 변방의 요새로 보낸다.

과도한 숙청이 손자 혜제惠帝(1398-1402)의 지지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자 북평北平(북경北京)의 번왕藩王 연왕燕王은 정난靖難의 변變(1399-1402)을 일으킨다.

환관宦官의 도움으로 제위帝位에 오른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1402-1424)는 환관을 중용하여 금의위錦衣衛를 강화한다.

환관 정화鄭和 제독이 이끄는 수백척의 배는 말라카와 실론에서 홍해 입구와 잔지바르까지 6차례 항해하며 조공무역을 발전시킨다.

서기 1421년 1월 1일 영락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북경北京(북평北平)으로 도읍지都邑地를 옮긴다.

수도를 북상시키자 한족의 중심지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역사의 무대가 바뀐다.

 

마지막 황제

마지막 황제

 

건주여진建州女眞 출신의 누르하치는 30여 년간의 퉁구스계 국가간 패권투쟁과 여진족 내분을 종결짓고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기울자 서기 1616년 후금後金을 세운다.

독자적 군제 팔기제八旗制에 몽고족과 한족을 편입시켜 국가조직으로 재편한 천명제天命帝(1616-1626) 누르하치는 사르후Sarhu전투(1619)의 승리로 요동遼東의 거점을 장악한다.

만주 지역을 완전히 차지한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요서遼西로 진출하여 선양瀋陽(봉천奉天)을 점령한 후 수도首都로 삼는다.

숭덕제崇德帝(1626-1643) 홍타이지는 육부제六部制의 설치로 권력의 집중화를 꾀하며 군정과 민정을 분리시켜 관료국가체제를 완비한다.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朝鮮공략에 나선 홍타이지는 조선의 입지를 제한한 후 북원北元의 링단林丹 칸汗을 토벌하여 내몽고를 손에 넣는다.

서기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선포한 태종 홍타이지는 유교적 대의명분에 갖혀 패권의 흐름을 인지하지 못한 조선에 출정出征하여 삼전도三田渡에서 황제 즉위식을 한다.

숙부 도르곤이 수도首都를 북경北京으로 옮겨 섭정攝政을 한 순치제 이후 강희제, 옹정제, 건릉제의 3대 130년간 청나라는 중국 360주기 제3기·제4기(1678-1797)를 지나며 황금기를 맞는다.

하지만 서기 1760년 복건성福建省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결사체 ‘천지회天地會’가 결성되며 동요가 시작되자 내란과 열강의 위협이 표면화된다.

동치제同治帝(1861-1874)를 대신하여 섭정攝政을 한 서태후西太后는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화중華中·화남華南 출신 한족漢族 관료 증국번曾国藩·이홍장李鴻章의 개혁에 동조同調한다.

그러나 청·일 전쟁(1894)의 패배로 양무洋務운동이 실패하자 광서제光緖帝(1874-1908)는 서태후를 견제하며 하층관료들과 정치개혁으로 부국강병 시도에 나선다.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의도를 간파한 서태후는 보수파와 연대해 광서제를 연금軟禁시키고 변법조치들을 폐기廢棄한다.

서구열강은 외세배척을 명분으로 규합된 의화단義和團 운동(1899-1901)을 진압한 후 무분별한 중국분할을 우려해 서태후 체제를 보존시킨다.

1908년 광서제光緖帝가 자식없이 사망하자 서태후는 2세의 부의溥儀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선통제宣統帝(1908-1912) 부의溥儀는 자금성에서 허수아비 황제로 시간을 보낸다.

서태후가 북경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외국 군대의 주둔권을 인정함에 따라 청淸나라(1616-1912)는 무방비 상태가 되어 종말을 고한다.

 

신해辛亥혁명(1912)으로 중화민국을 수립한 손문孫文은 안정적 지배를 위해 북양군北洋軍의 군권 지배자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넘긴다.

위안스카이가 시대를 역행하여 독재 체제를 굳히려다 사망하자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군벌軍閥 할거割據가 시작되나 장개석張介石은 북벌을 완성해 국민정부(1928-1949)를 수립한다.

퇴위당한 부의溥儀는 1차 국공합작(1924)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일본의 조계지인 천진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부의溥儀를 꼭두각시 황제에 앉혀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낸다.

일본 제국주의의 거친 파고는 만주국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부의溥儀의 시도들을 무력화시키며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모택동은 준의遵義회의(1935)에서 정치전면에 부상하며 장학량張學良이 주도한 서안사변西安事變에 따라 장개석과 일시적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제2차 국공합작을 파기한 모택동은 전략적 공격과 대치對峙의 지구전持久戰으로 국민당군을 궤멸시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다.

일본의 항복으로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부의溥儀는 1950년 중국에 송환된 후 도쿄재판의 피고인으로 투옥되어 10년 동안 전범 재교육을 받는다.

모택동의 특별 사면으로 북경에 돌아와 소소한 삶을 이어가며 회고록 ‘황제에서 시민으로(1964)’를 집필한다.

극도의 무질서로 치닫는 문화대혁명(1968-1977)을 지켜보며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는 눈을 감는다.

문화대혁명은 정치적 격류에 휩쓸린 인간의 비극과 권력의 허무함의 또다른 상징이다.

 

Written by : nomadsirius

‘Sirius’ is the brightest star in the night sky. Its name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Seirios, meaning ‘glowing’ or ‘scorching’. Imagining Sirius rising just before sunrise, I begin the classic ‘Nomad’ journey. To let the West know the essence of Oriental culture, I am planning to publish 333 e-books and a Fantasy in English.

On Making  All Things Equal

All  things are essentially one. East and West can no longer be kept apart

A discerning mind is a fixed mind. It divides and confronts the world. The heart given by Heaven is an open mind. Embracing the world, there is no co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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